이름 : 자우림
생애 : 1997년 1집 앨범 [Purple Heart]로 데뷔
장르 : 락
이슈 : 너목보 시즌7에서 팬과 함께 감동의 듀엣 무대 선사
앨범 : Goodbye, grief.
누구나 스물이 되면 거창한 꿈 하나 정도는 꾸는 법이다. 그런데 그걸 ‘20대의 무한한 가능성’ 따위로 포장해서 선전하는, 청춘 보부상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아프니까 청춘이다”처럼 청춘을 스테레오타입화하는 지루한 문구들. 그 이전에 필요한 건,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직시다. 일례로, 자우림은 8집의 오프닝 트랙 ‘Happy Day’의 부기에 밴드의 세계관을 ‘패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낙관적’이라고 정의했던 바 있다. 9집 < Goodbye, grief. >의 첫 싱글 ‘이카루스’에서 그들은 이걸 ‘사소한 비밀 얘기 하나’라고 노래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사소한 비밀 얘기 하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이 곡의 성취는 특별하다. 자우림 9집의 유전자 정보가 이 곡 하나에 다 들어있다. 선동적이면서도 도취적인 김윤아의 기품 있는 보컬,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멤버들의 능란한 연주, 인상적인 주요 멜로디와 그 뒤를 부드럽게 감싸는 보컬 하모니, 점층적인 구조로 현명하게 조율된 곡 전개 등, 2000년대 이후 자우림이 발표한 최고의 싱글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는 그러나 이 곡이 앨범의 10번째에 실려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첫 싱글인데 음반의 후반부에 위치해 있다니, 이건 명백히 스토리텔링을 고려한 배치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스트링 세션으로 문을 여는 첫 곡 ‘Anna’에서 화자는 ‘안나’에게 처절하게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있다. 자연스럽게 안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형성될 것이다. 뒤를 잇는 곡의 제목은 ‘Dear Mother’다. 그렇다고 해서 ‘Dear Mother’에서의 엄마가 안나라는 식의 결론은 단면적인 만큼 위험해 보인다. 그보다는 이 두 곡의 주인공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지점을 겨냥해야 할 것이다. 바로 삶에 대한 ‘좌절’과 상대방에 대한 ‘죄의식’이다.
이런 주제에 맞춰 자우림이 연출해내는 사운드는 장르를 무람없이 오가면서 듣는 이들을 끌어당기는데 성공한다. 예를 들어 ‘Anna’에서는 피아노 연주와 현악 사운드로 스케일을 장악해나가면서 밀어붙이고, ‘Dear Mother’에서는 잔잔했던 초반부의 흐름을 가스펠풍의 리듬과 코러스로 갑작스럽게 변환시켜 혼란스러운 내면을 인상적으로 표현해낸다. ‘님아’ 역시 마찬가지다. 자우림은 이 곡에서 로큰롤 비트와 마치 시조를 연상케 하는 가사에 구성진 가락을 결합시켜 사랑에 빠진 화자의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기타와 건반 솔로가 현란하게 부딪히는 후반부가 특히 만족스럽다.
기쁨의 순간은 그러나 잠시 뿐이다. ‘템페스트’가 노래하듯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 까닭이다. 이 곡에서도 자우림은 테마에 맞춰서 곡의 전개를 능란하게 풀어간다. 폭풍을 예고하는 듯 둥둥거리는 드럼 연주을 근간으로 삼은 뒤 사운드를 겹겹이 쌓아가고, 마침내는 강렬한 이미지를 그려내는 와중에 격렬한 톤으로 폭발을 일궈낸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강렬함과 격렬함 사이의 뜨거운 합선(合線)이 곧 자우림 음악의 요체다. 이처럼 자우림 같은 좋은 록 밴드는 음악을 함에 있어 원심력과 구심력을 동시에 구현할 줄 안다. 척력으로써 완성도를 거머쥐고 인력으로써 설득력을 확보한다. 누군가 나에게 이에 대한 모범적인 예시를 묻는다면, ‘이카루스’나 바로 이 곡 ‘템페스트’를 일착으로 거론할 것이다.
‘I feel good’은 ‘템페스트’와는 반대로 화사한 기운이 곡 전반에 퍼져있다. 이 곡에서 아픈 기억을 지워버린 주인공은 잘 될 것만 같은 예감과 함께 폭풍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인생길에 오른다. 스트록스(The Strokes)풍의 세련된 로큰롤을 기반으로 하는 이 곡도 사운드와 가사가 불가피한 형식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도대체가 체위변경이 불가능한 수준을 쾌척한다. 이 곡을 떠나 이번 9집 전체가 굴삭해낸 가장 큰 성취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어지는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분위기는 다시 전환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날들을 추억하는 화자는 떠나간 당신을 멜로디만큼이나 애절하게 호명한다. 여기에서의 당신을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청춘의 그 어떤 찰나라고 받아들여도 좋겠다. 당신(이라는 청춘)은 어딘가에서 확실하게 존재하지만, 나의 부름은 결국 너라는 존재의 의미에 가닿지 못한다. 청춘의 비극은 이러한 존재와 의미의 간극 속에서 탄생한다. 이 순간, 청춘은 마치 무지개처럼 가까워지면서 멀어지는 것인데, ‘무지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강조했듯이 9집의 키워드는 ‘좌절’과 ‘죄의식’이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떠나간 누군가에 대한 죄의식은 청춘이라는 시절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이카루스’가 앨범의 10번째에 위치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카루스’는 ‘좌절’과 ‘죄의식’, 이 둘 모두를 품에 안고 마지막 곡 ‘슬픔이여 이제 안녕’와 함께 9집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 어떤 작품이든 첫 싱글은 대개 음반의 표정을 상징한다. 이 곡을 괜히 10번 트랙으로 넣은 게 아니라는 의미다.
자우림은 이 음반에서 긍정주의라는 복음을 빌려 ‘넌 할 수 있어’라거나 ‘슬픔 따위 안녕’이라는 선(善)해석으로 듣는 이들을 마취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냉엄한 현실을 먼저 마주하라고 말한 뒤 ‘이카루스’의 가사처럼 슬며시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러니까 뭐랄까. 마취제가 아닌 각성제로서의 음악이다.
다음과 같이 정리하려고 한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피할 수 없는 패배라고. 희망이란 건 그래서, 희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만 겨우 간절해질 수 있는 거라고. 그제서야 우리는 조심스럽게, ‘Goodbye, grief.’라고 노래할 수 있는 거라고.
추신: 이 글을 가사 자료 없이 썼다. 그럼에도 노랫말을 듣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김윤아의 탁월한 발성 덕분이다.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출처: 네이버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