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드라마
개봉일 : 2019-05-30
감독 : 봉준호
출연 :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등급 : 15세 관람가
봉준호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기생충]은 오래간만에 봉준호의 본류로 돌아간 영화라고 평가받는데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 [마더], [괴물] 같은 영화와는 조금 다른 부류입니다. 이전 영화들은 아주 생생하고 사실적인 배경에서 장르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봉준호 특유의 엇박자 유머와 비극이 일어났지요. 그런데 [기생충]은 순서가 좀 반대예요. 일단 아주 모범적인 장르 스토리와 배경이 먼저입니다. 그 배경은 봉준호보다는 좀 박찬욱을 닮았어요. 그 박찬욱스러운 세계에 아주 봉준호스러운 인물들이 특유의 엇박자로 슬금슬금 들어가는 거죠.
"이렇게 한국적인 이야기를 외국 관객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반응을 좀 들었어요. 하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까지야. 앞에서 이 영화가 좀 박찬욱 닮았다고 했잖아요. 그건 이 영화가 한국어로 번역된 서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용을 보세요. 구성원 전원이 백수인 가족이 있습니다. 이들 중 아들이 가짜 서류를 갖고 부잣집 과외 교사로 들어갑니다. 가족은 조금씩 수를 써서 이전에 있던 고용인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친숙하죠? 이 친숙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여러분의 기억을 건드리는 작품들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온 서구 배경의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이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남궁현자 건축가의 저택은 19세기 멜로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몇백년 묵은 대저택을 번역한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 백수 가족은 하인 계급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이정은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척 봐도 '집사'역이죠. 이건 서구적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나라 현대 문학이나 영화에서 이런 계급 묘사는 서구만큼 흔하지 않거든요. 우린 그들과 다른 사회 진화를 거쳤으니까요. 봉준호 인터뷰를 읽어보니 영국에서 리메이크 제안이 들어왔다고요. 그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이해가 됩니다.
물론 이 번역은 훌륭합니다. 주인공 백수 가족의 반지하방 묘사는 극사실적이기 짝이 없죠. 거의 스크린에서 냄새가 흘러나올 지경입니다. 고액 과외, 부잣집 가족의 속물 근성, 서구 고급 문화의 추종 등등도 한국 문화 속에서 한국인이 보았을 때 더 의미가 뚜렷해요.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K스럽다는 말이 나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처럼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감성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전 이 영화가, 봉준호가 영어로 만든 [설국열차]나 [옥자]보다 더 해외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운 영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봉준호의 영어 영화는 서구 영화인 척하지만 이상하게 번역이 어려운 한국적 감수성이 녹아있으니까요. 하지만 [기생충]은 그보다 더 명쾌한 언어로 명쾌한 장르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이야기의 국면 전화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우린 끊임 없이 자극받고 긴장하면서도 그 리듬을 따라가고 결말의 분위기를 짐작하지요.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처럼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라는 생각이 든다기보다는 '아, 맞아, 여기로 갈 수밖에 없지'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입니다. 결말에 도달하면 딱 하고 모든 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이 과정의 장르적 쾌감은 대단합니다. 올해 제가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재미있는 작품 중 하나였지요.
연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영화는 백수가족과 부자가족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백수가족 역의 배우들은 모두 봉준호 스타일의 연기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부자집 부부로 나오는 조여정과 이선균은 자기 스타일 그대로 연기를 하고 있죠. 그리고 이 앙상블 영화에서 스타대접을 받는 건 조여정입니다. 이선균의 캐릭터는 그냥 기능적이지만 조여정은 자신의 배우로서의 개성과 매력을 자기 캐릭터에 최대한 쏟아붓고 있으니까요. 자칫하면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전체 앙상블에 잘 녹아드는 거죠. 박소담과 조여정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 쿵짝이 너무 잘 맞아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생충]은 봉준호의 최고작이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영화 줄 세우기가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 영화가 본류로 돌아갔다는 주장엔 반대할 수밖에 없군요. 스토리와 설정은 장르적으로 친숙하지만, 영화가 장르를 다루는 방식, 배우를 다루는 방식, 스토리를 다루는 방식 기타등등은 봉준호의 이전 영화의 반복이 아닙니다. 봉준호는 지금까지 간 적 없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거고, 거기에서 앞으로 뭐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출처: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