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드라마
개봉일 : 2019-04-11
감독 : 김윤석
출연 : 염정아, 김소진, 김혜준, 박세진, 김윤석
등급 : 15세 관람가
건대 롯데시네마에서 한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 언론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원래 전 마스킹 안 하는 상영관에서 하는 시사회엔 잘 가지 않는데, 이번 영화의 화면비는 비스타더군요. 그래도 화면 위에 여전히 그레이 바가 생깁니다. 다들 눈이 있을 텐데 왜 그게 신경이 안 쓰이는지 모르겠어요.
원작 때문에 좀 머리를 썩혔던 영화입니다. 제가 아는 데니스 폰비진의 희곡을 각색한 건 당연히 아니었죠. 다른 원작이 있다면 그건 도대체 무슨 작품이지? 오늘 기자간담회에서 간신히 정보가 정리되었습니다 (들어보니 이전 제작 발표회에서도 언급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보람 작가의 2014년작 희곡이 원작입니다. 단지 정식 공연이 되지 않았고 제목도 달랐기 때문에 검색이 어려웠던 것이죠. [카사블랑카]나 [문라이트]의 경우와 비슷한 경우겠지요. 하여간 원작이 있고 원작자가 있다면 보도자료에서 분명히 밝히는 게 옳습니다. 아무리 각색이 되었다고 해도 이 캐릭터들과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잖아요.
영화는 아주 고루한 아침 연속극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아빠가 오리 고기 집을 하는 여자와 바람이 났고 여자는 임신을 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의 딸은 하필이면 아빠의 딸과 같은 학교에 다닙니다. 두 딸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리고 결국 엄마도 그 사정을 알게 되지요. 이 상황에서 아빠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그나마 할 생각도 없습니다.
김윤석은 [미성년]을 작정하고 여자들의 영화로 만들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원작도 그랬으니까요. 이 영화에는 의미있는 역할이 있는 남자들이 세 명 정도밖에 안 나오고 다들 찌질하거나 재수 없으며 비중도 낮습니다. 김윤석의 연기하는 '아빠'도 예외는 아니죠. 영화는 아빠의 내면엔 별 관심이 없고 그렇게 공들여 용서해줄 생각도 없습니다. 관심은 모두 여자들에게 쏠려 있지요. 단지 아무리 그래도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남자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남자 없이는 시작도 할 수 없어요. 설정상 극복할 수 없는 한계지요.
60년대생 한국 중년남자가 여자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에고를 줄이고 귀를 기울이면 되겠지요. 일단 원작자가 여성이고 같이 일하는 배우들이 있으니까요. 영화는 완벽하게 자연스럽거나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특히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일 때는 종종 시선이 바깥에서 맴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의 바른 중년 남자가 여자들의 이야기를 하려 할 때 느껴지는 간지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영화는 상당히 재미있고 입체감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을 갖고 전형성에서 벗어난, 이해심이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긴 아빠를 쫓아내기만 해도 일일 연속극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고 의미도 없는 남자에게 지나치게 큰 무게감을 부여하는 게 한국 멜로드라마의 극악스러운 단점이죠. (최근작으로는 [스카이 캐슬]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남자를 빼고 그에 대한 의무감을 줄이자, 영화의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진행되기만 해도 훨씬 재미있어지고 일반적인 불륜 연속극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결정적으로 더 좋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컴컴한 상황을 그리고 있고 답이 보이지는 않지만 꾸준히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적절한 페이스의 드라이한 코미디를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배우들이 좋습니다. 배우 감독의 장점이겠지요. 염정아를 제외하면 스타성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은 캐스팅인데, 캐릭터에 딱 들어맞고 배우에게도 어울리며 공연자와의 합도 좋습니다. 불필요한 '명연기'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배우의 개성과 결을 잘 살리고 있고요. 예를 들어 김소진 배우의 특유의 말투가 있잖아요. 이걸 여기서만큼 잘 써먹은 영화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배우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와요. 그냥 튀어나올 뿐만 아니라 다들 재미있게 잘 써먹고 있죠.
그렇게 야심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일단 저예산이고요. 감독 김윤석에게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실험해본 조심스러운 연습이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최근 몇 달 동안 제가 본 한국 영화 중에선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었고 이런 영화들에 자동적으로 따라붙은 불쾌함과 거부감은 의외로 덜 느껴졌습니다. 예의바르고 조심스럽지만 자신의 장점은 확실하게 살린 데뷔작이었어요.
출처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