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드라마
개봉일 : 2019-01-03
감독 :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출연 : 유태오, 로만 빌릭, 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등급 : 15세 관람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레토]는 나탈리아 나우멘코라는 사람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누구냐고요. 소련 록그룹 주파크의 리더 마이크 나우멘코의 아내입니다. 마이크 나우멘코는 냉전이 한창이던 80년대에 영어 이름을 달고 록음악을 했던 사람이에요. 당시 소련 록음악 역사에서 빼먹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주파크의 노래 상당수는 서구 록음악의 표절/번안/번역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구 문화가 금기시되던 나라에 살면서 그 낙차를 이용해 유명세를 떨친 사람이었던 거죠. 무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영화는 나우멘코 부부의 일상과 그들이 속해 있는 1980년대 초 레닌그라드 록문화를 그리면서 시작됩니다. 영화가 그리는 레닌그라드 록 클럽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참 촌스럽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에 그려지는 당시 록 콘서트는 클래식 콘서트와 다름 없어요. 얌전히 앉아 듣고 있다가 박수를 치는 게 어쩜 그렇게 조신한지. 좋아하는 밴드에게 어필하려는 팬들의 조촐한 시도도 제지당하고, 뒤에서는 KGB가 감시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철의 장막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있는데, 그에 대한 억압은 여전히 노골적입니다. 맞아요. 이 영화엔 록큰롤을 다룬 음악영화의 모범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나우멘코 부부의 일상은 빅토르 최라는 19살 음악가가 들어오면서 균열이 일어납니다. 일단 두 사람은 빅토르의 재능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나탈리아와 빅토르는 서로에게 끌리고요. 서로에 대한 호감, 부러움, 질투, 연민, 불안이 적절하게 배합된 예술가들의 삼각관계가 시작되는 거죠. 이들의 관계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건 빅토르의 재능입니다. 마이크는 자신이 서구 록음악의 모방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빅토르는 마이크를 넘어서는, 진짜 재능과 개성을 가진 음악가죠. 단지 아직 마이크의 도움과 조언이 필요한 단계인 겁니다. 이들의 관계가 아슬아슬 이어지는 동안 빅토르 최는 레닌드라드 록 클럽에서 데뷔하고 록 그룹 키노를 결성하고 첫 앨범인 [45]를 냅니다.
[레토]의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충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당시 업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이 영화의 묘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더군요. 세레브렌니코프가 얼마나 확신을 갖고 과거를 재현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 생각에 이 영화가 그린 80년대 초의 레닌그라드는 실제 레닌그라드보다는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록큰롤을 하던 청춘들에 대한 보편적인 고정관념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거 같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오히려 저희 같은 외국인 관객들은 더 편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몰라요. 영화가 그린 사람들은 우리도 알 거든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그와 비슷한 시기를 거쳤으니까요.
나른한 백일몽 같은 영화이며 실제로 정말 어느 정도는 백일몽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장면 상당수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혹시 관객들이 속아넘어갈까봐 등장인물 한 명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걸요. 운나쁘게 주인공을 지나치던 레닌그라드의 성실한 시민들은 80년대 서양 뮤직 비디오의 모작에 말려들어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요. 이 모든 묘사는 사랑스럽고 귀여운데, 그래도 이 영화를 다 마친 뒤 보다 진지하게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출처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