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드라마
개봉일 : 2017-06-28
감독 : 이준익
출연 :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등급 : 12세 관람가
이준익의 신작 [박열]의 포스터와 예고편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왜 쟤 혼자만 저기서 저러고 있지?"였습니다. 저 말고도 많이들 그랬을 거예요. 박열 전기 영화가 박열의 이야기만을 할 수는 없죠. 박열과 그의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언제나 패키지였습니다. 둘 중 한 명만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실 둘을 비교했을 때 더 관심이 가는 쪽은 가네코 후미코입니다. 10년 전 KBS 스페셜에서 이들에 대해 다루었을 때도 주인공으로 삼았던 건 박열이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였죠.
이해는 갑니다. 여러 문제가 있죠. 일단 캐스팅의 문제가 있습니다. 박열 역할에 일급 스타를 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사정이 좀 다르죠. 이준익은 [동주]에서 일본인 조역으로 나왔던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 최희서를 이 역에 캐스팅했는데, 이렇게 되면 홍보의 비중이 박열에게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준익은 [동주], [사도]를 잇는 두 글자 제목을 원했던 것 같고. 하지만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했고 이런 예고편과 포스터는 걱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포스터의 경우는 이후에 최희서의 비중을 조금씩 늘려갔지만요.
영화는 어땠느냐. 다행히도 일부러 박열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전 여전히 더 높길 바랐지만 가네코 후미코의 비중도 상당히 높았죠.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이준익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거의 세미 다큐멘터리 수준의 기준을 세웠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개봉된 [조피 솔의 마지막 나날들]와 비슷한 수준의 엄격함. 이 영화에 나오는 장면과 대사는 대부분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80퍼센트 정도가 실제로 있었던 대사 그대로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건 두 캐릭터의 비중은 균형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정보를 말씀드린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불령사라는 조직에 속해있던 아나키스트 커플이었습니다. 관동대지진 이후, 두 사람은 히로히토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는데, 이들은 오히려 그 법정을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인 학살을 비판하는 무대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둘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는데, 가네코 후미코는 자살했고 (여기에 대해서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열은 20여년을 복역하다가 전후 미군에 의해 석방되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죽기 전에 자서전을 썼는데 이 영화에도 내용이 일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다룬 영화들은 주로 민족적 분개에 빠지는 경향이 강한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민족주의와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부당하게 죽어간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는 있었겠지만 그게 꼭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건 아니죠. 심지어 두 주인공 중 한 명은 일본인입니다. 영화가 종종 축축해지고 끈끈해지는 동안에도 두 주인공들은 여전히 자기 방향을 알고 있어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대부분 실제 대사이고 자기들 목소리라고.
영화 역시 될 수 있는 반일의 단순한 공식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다른 문제지만요. 이 영화에 나오는 일본인 캐릭터들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 위에 분포되고 있습니다. 미즈노 렌타로와 같은 노골적인 악당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색 관료들이고, 두 주인공을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와 같은 양심적인 지식인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한국 영화들이 그린 일본에 비해 이 영화의 일본은 훨씬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곳입니다.
영화를 끌어가는 것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두 사람의 캐릭터입니다. 종종 영화가 이 두 매력적이고 어처구니없고 열정적이고 유머 넘치고 대체로 살짝 맛이 간 20세기 젊은이들에게 끌려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준익은 이들을 통제할 생각이 없고 곧장 말해 통제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지나치게 예의바르고 사람이 좋죠. 이들을 갖고 더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상상력을 조금만 더 해서 두 주인공의 내면을 더 팔 수도 있었고 살아남은 박열 캐릭터의 후반 인생을 다루면서 그를 더 냉정하게 비판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그 길들은 이준익이 봤다고 해도 안 갔을 길입니다. 결국 그는 그가 고른 주인공들을 최대한 존중하며 이야기를 꾸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옛날 애국자들을 다룬 영화의 흔한 클리셰나 감상주의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 때는 종종 갑갑합니다.
캐스팅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고 말씀드렸죠. 이상적인 박열 영화는 일본영화여야 할 것 같습니다. 대사가 있는 중요한 인물들 대부분이 일본인이고 중요한 대사 역시 일본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준익은 어느 선에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인들 귀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일본어 구사자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영화이긴 해요. 일본어와는 별도로 이제훈과 최희서의 캐스팅은 인상적입니다. 제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영화에 나온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행동했지만 여전히 똘끼와 에너지에 차 있고 나올 때마다 스크린을 장악합니다. 최희서는 [동주]에서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는 바닐라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여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기우였죠. 다른 영화에서 더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컨텐츠 제공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