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범죄, 로맨스, 멜로
개봉일 : 2015-06-04
감독 : 윤재구
출연 : 임수정 , 유연석 , 이경영 , 박철민
등급 : 15세 이상
(원작과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는 제 어린 시절 트라우마입니다. 지금도 이 책을 생각하면 기분이 안 좋아요. 그 뒤에 이보다 더 험악한 내용의 책이나 영화를 많이 봤지만 그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충격과 억울함은 쉽게 잊히지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이란 대부분 그렇죠.
이 영화를 윤재구가 [은밀한 유혹]이란 제목으로 각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했어요. 그 결말을 그대로 쓸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분명 새로운 결말을 추가해서 해결을 볼 텐데, 전 그게 나쁜 각색 방향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추리물의 논리로 보면 [지푸라기 여자]는 지나치게 성급하게 포기하고 끝난 구석이 있습니다. 주인공에겐 맞서 싸울 충분히 좋은 스토리가 있으니까요. 범인이 자상하게 자기 음모를 다 설명해줬잖아요.
결국 그래서 봤는데... 근데 내용 아세요? 영화 이야기만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지연은 마카오에서 여행사를 하다가 망하고 친구 배신 때문에 빚에 시달리고 있는데, 성열이란 남자가 제안을 하나 해옵니다. 자신이 비서로 일하고 있는 마카오 카지노 사업체의 회장과 결혼하고 나중에 회장이 죽으면 재산을 반으로 나누자고요. 지연은 성열의 지시를 따르며 회장을 유혹하는데 그만 결혼하자마자 회장이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지연은 뒤늦게 여기서 자기가 몰랐던 또하나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물론 제가 가장 관심을 쏟은 건 결말입니다. 원작이 제시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 결말은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로 해답을 만들려면 원작에서 논리를 추출하고 캐릭터를 유지해야 하죠. 하지만 영화가 하기 싫은 학교 숙제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덧붙인 결말엔 둘 다 없어요. 특히 성열의 캐릭터는 완전히 딴 사람 같습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공들여 소설 속 음모를 꾸민 사람이 영화 속에서처럼 대충 일을 벌일 리가 없잖아요. 지연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덧붙인 설정들도 운과 억지가 너무 심해서 몰입하기가 싫고요.
결말만 그러냐. 아뇨, 영화 전체가 그렇습니다. [은밀한 유혹]은 장르 영화 작가로서 윤재구의 단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입니다. 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영화에서는 유달리 눈에 뜨여요. 설정은 인위적이라 믿음이 안 가고 대사는 거의 초벌 번역한 외국 소설 수준입니다. 그나마 앞의 두 영화는 과시적인 설정을 팔아먹을 수도 있었지만 이 영화는 그것도 아니죠. 감독으로서 그는 배우를 다룰 줄도 모르고 자기가 쓴 대사가 배우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을 때 얼마나 어색하게 들리는지 구별할 수 있는 귀도 없습니다. 연기 지도가 그냥 엉망인 영화입니다. 심지어 얼마나 엉망인지 계산할 수도 있어요. 요새 모든 한국영화에 나오는 이경영이 지표가 되어주니까요. 이 영화에서 그는 돈 때문에 70년대 싸구려 영화에 억지로 나오던 오슨 웰즈와 비슷합니다.
오래간만에 임수정이 출연한 영화인데, 여러 모로 아쉽게 되었습니다. 더 아쉬운 건 이 작품이 요새 정말 드물어진 여성주도 영화이고 임수정이 이 영화를 고른 것도 그 때문일 거라는 거죠. 고르고 고른 각본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건 지금 한국영화의 기형적인 성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
기타등등
[은밀한 유혹]이라는 카피 제목을 당연하게 쓰고 있는 태도부터가 게으르기 짝이 없잖아요. 제목에서부터 그렇게 안이하게 굴면 어떻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