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드라마
개봉일 : 2016-02-04
감독 : 토드 헤인즈
출연 :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카일 챈들러, 제이크 레이시, 사라 폴슨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1952년에 클레어 모건이라는 작가가 [소금의 값]이라는 로맨스 소설을 발표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클레어 모건은 2년 전에 [열차안의 낯선자들]로 추리소설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필명이었고 하이스미스는 몇십 년 뒤에야 자신이 그 소설의 저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 동네 레즈비언 독자들은 하이스미스가 모건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해요. 하긴 작은 동네니까.
[소금의 값] 이전에도 레즈비언/게이 소재의 소설들은 많았어요. 사실 꽤 인기있는 통속 장르이기도 했죠. [소금의 값]이 특별했던 건 이 작품이 당시에 나왔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거의 확실한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연인의 키스로 끝나는 건 아니었지만 해피엔딩의 확신이 있었죠. 영화 속 LGBT 캐릭터들이 해피엔딩을 보장받은 게 80년대부터라는 걸 생각하면 이 소설이 당시에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 동안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아카데미상은 살해당하거나 에이즈로 죽어가는 퀴어 캐릭터들을 선호한다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LGBT 소재 예술작품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세상의 일부가 되었지요. 그리고 [소금의 값]은 그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원형을 제공했습니다. 토드 헤인즈 감독, 필리스 나지의 각색으로 나온 [소금의 값]의 영화판인 [캐롤]이 친숙한 영화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시작부터 '고전'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죠.
소설과 영화는 모두 예술가 지망생인 백화점 직원 테레즈 벨리벳과 딸의 장난감을 사러 온 연상의 여성 캐롤 에어드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요. 차이점이 있다면 백화점 직원인 테레즈 벨리벳이 소설에서는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지만 영화에서는 사진작가 지망생이란 것이죠. 하여간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같이 떠난 여행 중에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지만 캐롤은 이혼을 앞두고 딸의 양육권 때문에 남편과 갈등을 빚고 있는 중이죠. 이 이야기의 도입부는 하이스미스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백화점에서 만난 고객에게서, 캐롤의 사연은 하이스미스의 옛 애인이었던 버지니아 켄트 캐서우드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소설과는 달리 영화는 테레즈의 회상으로 시작되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는 데이빗 린/노엘 카워드의 고전 [밀회]의 도입부를 그대로 훔쳐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설정은 [밀회]보다 [캐롤]에 더 그럴싸하게 들어맞아요. 유부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걸 보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미심쩍게 생각하겠지만 여자 둘이 같이 있는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잖아요. [캐롤]은 사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사랑의 이야기를 가장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그려내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멜로드라마의 전통은 세례요한처럼 지난 60여년 동안 하이스미스의 소설이 쌓은 새로운 전통에 권위를 부여하죠. '금지된' 사랑에 대한 '도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로맨스로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물론 동성애 이야기에만 속해있는 재료들이 있습니다. 50년대 사람들이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죠. 영화는 원작에선 철저하게 테레즈의 관점에서 그려졌던 캐롤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파고 있는데, 이런 사회적 주제들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도 여기입니다.
하지만 [캐롤]은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영화이고, 어떤 주제보다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롱기누스가 인용한 사포의 시를 생각해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테레즈의 감정은 철저하게 감각화되어 에드워드 라크먼이 슈퍼 16밀리로 찍은 화면에 그대로 새겨집니다. 기본적으로 더글러스 서크 패스티시였던 [파 프롬 헤븐]과는 다른 영화입니다. 라크먼과 헤인즈는 이 영화를 위해 주로 4,50년대에 활동했던 여성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참고했다고요. 남성 오퇴르의 영화적 스타일을 따르는 대신 여성 사진작가의 시선을 모방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지향점을 알 수 있지요. 어떤 때는 주인공에 완전히 동화되었다가 어떤 때는 댄스 파트너처럼 살짝 뒤로 물러나 뒤를 따르는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은 거의 두 주연배우가 보여주는 연기의 연장선처럼 보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배우의 의존도가 높고 또 배우의 질이 좋습니다. 캐롤 역의 케이트 블란쳇은 거의 완벽하게 캐스팅되어서 거의 다른 배우를 떠올리는 게 힘들 정도죠. 하지만 영화의 구심점은 테레즈 역의 루니 마라입니다. 저에게는 올해의 '여자주인공'이에요. 40년대 '여성 영화'의 주인공처럼 전통적이고 위엄이 있으면서 연기 디테일은 신선하지요. 전 보통 구석으로 밀려나기 마련인 캐롤의 남편 하지 역의 카일 챈들러도 좋았습니다. 50년대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살려주던 조단역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았고요.
컨텐츠 제공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