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드라마
개봉일 : 2024-01-31
감독 : 쥐스틴 트리에
출연 : 산드라 휠러, 스완 아르라우
등급 : 15세 관람가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는 작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죠. 이번 아카데미상 5개 부분 후보이기도 하고요.
프랑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에 오른 건 수입사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영어 비중이 높아서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고편만 보면 그냥 영어 영화처럼 보여요.
영어 비중이 높은 건 이 영화에서 잔드라 휠러가 연기하는 주인공 잔드라 포이터가 프랑스 교수와 결혼한 독일 작가이고,
프랑스어가 아주 완벽하지 않아 영어를 주로 쓴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휠러는 프랑스어로만 연기하려 했지만 트리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쓰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어 사용자 관객들에게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을까요? 그럴지도.
영화에서 추락은 사뮈엘 말레스키라는 남자의 추락사입니다.
시각장애인인 아들 다니엘이 안내견 스눕과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3층 다락방에서 떨어져 죽은 걸 발견했어요.
당시 집에는 사뮈엘의 아내인 잔드라만 집에 있었어요. 사뮈엘은 다락방 개조 작업을 하다가 실수로 추락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충동적인 자살일 수도 있고 살해당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살해당했다면 범인일 수 있는 사람은 잔드라밖에 없습니다.
잔드라는 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화 러닝타임의 절반 정도 또는 그 이상이 이 재판 과정을 담고 있어요. 굉장히 밀도가 높은 법정물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검사는 오로지 법정 장면에만 나오기 때문에 검사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의 묘사를 통해서만 캐릭터를 읽을 수 있지요.
그것만으로도 넘칩니다만. 최근 들어 법정 장면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프랑스 영화를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트리에의 첫 법정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전에 [빅토리아]라는 제목의, 변호사 주인공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건 당연히 '사뮈엘이 어떻게 죽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스포일러가 아니냐고요. 아뇨. 러닝타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런 영화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영화는 하나의 진실을 제공할만큼 당시 사건에 밀접하게 접근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관객들은 배심원의 입장에서 주어진 수많은 정보를 해석해 스스로 답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이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답이 진짜라는 확신은 가질 수 없습니다.
심지어 진상은 잔드라를 연기한 휠러도 모른다고 합니다. 트리에가 안 가르쳐줬대요.
그렇다면 불친절한 영화냐. 그건 또 아닙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잔드라와 사뮈엘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드라마를 통해 주고 있어요.
그리고 보다보면 '사뮈엘이 어떻게 죽었나'는 생각보다 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사뮈엘은 그 날 죽을 팔자였던 거 같아요.
잔드라가 죽이지 않았어도 사고나 자살 또는 그것들이 적당히 섞인 이유로 죽었을 것 같다는 거죠.
이 사람의 사인이 무엇이건 잔드라와 사뮈엘에 대한 캐릭터 해석은 바뀌지 않습니다.
험악한 결혼의 이야기입니다. 잔드라는 잘 나가는 성공적인 작가입니다.
사뮈엘은 소설가의 꿈만 꾸고 있을 뿐, 단 한 번도 소설을 끝낸 적이 없습니다.
아들 다니엘은 사고로 시력을 잃었는데, 이 사고로 결혼생활의 갈등은 더 커져갔죠.
게다가 사뮈엘은 잔드라의 양성애 성향 때문에 의심이 잦고 그 때문에 또 위축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뮈엘은 자기보다 잘 나가는 아내 밑에서 '안사람' 역할을 하는 남자이고, 그 위치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재판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갈등이 어떻게 쌓이다 폭발했는지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트리에는 이 영화의 각본을 남친인 아르튀르 아라리와 같이 썼는데, 두 사람의 개인사가 영화에 얼마나 투영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영화는 이런 사건을 바라보고 소비하는 대중의 시선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잔드라는 여러 모로 마리 앙트와네트를 연상시킵니다.
독일인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영화 속 텔레비전 방송의 어떤 패널이 지적했듯 그냥 '자살인 것보다 살인인 게 더 재미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인터뷰를 읽어 보니 트리에는 악명 높은 아만다 녹스 사건에서 이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더군요.
2시간 반이 넘는 영화지만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간낭비가 없고 페이스가 빠르며 치밀하고 압축적인 영화예요.
그리고 이 영화의 재미는 재감상 때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종류인 거 같아요.
답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끊임없이 중층의 해석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완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인물간의 복잡한 긴장감도 상당하거든요.
그리고 영화는 이 복잡성을 풍부하게 표현해내는 훌륭한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다니엘의 안내견 스눕을 연기한 보더 콜리 메시지요.
출처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