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멜로/로맨스
개봉일 : 2023-12-20
감독 : 아키 카우리스마키
출연 : 알마 포이스티, 주시 바타넨
등급 : 12세 관람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고 왔어요.
다들 심각하게 말랑말랑하다고 하는 번역제입니다. 정확하게 의미를 살리려면 [고엽]이라고 해야 해요.
이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20세기 대중음악과 약간의 19세기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데, 자크 프레베르 작사, 조셉 코스마 작곡의 [고엽]도 이 중 하나거든요.
실제 낙엽보다 [고엽]이 주는 분위기가 더 중요하죠. 하지만 지금 [고엽]이라고 제목을 붙이면 너무 구식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영화의 배경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2024년입니다. 식당 주방에 2024년 달력이 붙어 있거든요. 꾸준히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가 나오고요.
하지만 그 뉴스가 나오는 건 구식 아날로그 라디오. 이 영화에서 휴대폰을 갖고 있는 건 여자주인공 안사밖에 없는 거 같아요.
중간에 노트북 컴퓨터도 하나 나오긴 하니까,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곳은 아닌데, 그래도 21세기보다는 20세기스러운 곳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네는 아무래도 놀 곳이 가라오케바와 리츠라는 아트하우스 극장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헬싱키의 실제 아트하우스 극장이 그렇게 옛날 영화 포스터로만 장식되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에 전 20원을 걸 수 있습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모두 노동자계급입니다. 여자주인공 안사는 동네 마트에서 일을 해요.
영화 후반에야 이름이 밝혀지는 남자주인공은 공장에서 금속 다루는 일을 하고요. 두 사람은 가라오케바에서 만납니다.
맘에 들어서 같이 아트하우스 극장에서 자무쉬의 [데드 돈 다이]를 봐요. 여자가 남자에게 번호를 주는데, 여긴 아키 카우리스마키 월드잖아요.
여자는 쪽지에 직접 번호를 적어 주고 그만 남자가 그걸 잃어버립니다. 고난의 시작이죠.
이 고난은 몇십분 뒤에 해결되는데, 그 뒤에 다른 고난이 닥칩니다.
(관객들 입장에서) 연애를 재미있고 아슬아슬하게 만든 상황들이 꾸준히 일어나요.
두 사람에게는 연애말고도 고민이 많습니다. 여자주인공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해고 당합니다.
남자도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을 겪고 해고 당해요. 경중을 따진다면 남자쪽이 덜 억울합니다.
여자는 정말 아무 잘못도 안 했지만 남자는 문제가 있습니다. 술담배요. 소위 고기능 알코올 중독자인 거 같아요.
술마시는 게 일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술을 그렇게 마시면 안 되지요.
그리고 남자의 음주습관은 연애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이야기의 재료만 따진다면 참 평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일단 이 모든 일들이 카우리스마키 월드 특유의 논리로 전개가 되는데, 그 무뚝뚝한 흐름이 정말 재미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 특유의 방식으로 웃깁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표정이 없는데요 (후반부에 가면 주인공 안사가 두 번 정도 미소를 짓긴 합니다.)
그와 별개로 다들 조금씩 웃기는 말을 하려고 입에 발동을 걸고 있습니다.
몇몇 농담은 반응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썰렁하긴 한데, 그래도 웃기긴 웃기는 거죠.
무엇보다 평범한 진행 과정을 따른다고 하는 로맨스가 여러 모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고 서스펜스를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노동자 계급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 속 세계가 조금 현실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가 마트에서 겪는 일들은 한국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이 겪는 일과 다를 게 없고, 남자 주인공의 사정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 건조하고 삭막한 현실이 로맨스와 연결이 되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느릿느릿 상승합니다.
여전히 엄청난 행운이 따르는 건 아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두 사람의 삶은 나아져요.
귀여운 개도 한 마리 키우게 되고, 남자는 삶의 태도를 고쳐먹게 되고. 영화는 이게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는데, 그걸 냉소 없이 믿어버리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정말로 뛰어난 로맨스 영화입니다.
출처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