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드라마
개봉일 : 2020-11-12
감독 : 박지완
출연 :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등급 : 12세 관람가
[내가 죽던 날]은 [여고생이다]와 [곰이 나에게]의 박지완이 감독한 첫 장편영화입니다. 마지막 영화를 찍은지 11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그 사이에 [김씨 표류기]와 [초능력자]의 스크립터로 일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 영화도 10년 전 작품들.
김혜수가 스칸디나비아 누아르스럽게 우울한 주인공 형사인 현수를 연기합니다. 교통사고 때문에 징계받게 생겼고, 바람난 남편과 이혼을 앞두고 있고, 남편은 직장 동료와 자기가 불륜사이라고 우기고 있고, 건강도 안 좋아요. 감독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주인공을 학대하고 있다는 증거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상사의 지원을 등에 업고 복귀하려는 현수에게 일이 하나 떨어집니다. 증인보호차원으로 섬에 갇혀 살던 고등학생 세진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는데, 자살한 것 같지만 태풍 때문인지 시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죠. 이 사건을 어떻게든 보기 좋게 마무리하는 게 현수의 일입니다. 하지만 현수는 점점 세진이라는 아이에 몰입하게 되고 이 실종사건 뒤에 무언가가 더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상보다 훨씬 정통 추리물입니다. 형사의 탐문수사와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는 각본 덕택에 이미 존재하는 가상 소설의 각색처럼 보이기도 해요. 속도 전개도 빨라서 우울한 분위기에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어진 조각들이 치밀하게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여기저기에 상상력을 자극한 구멍이 있고 그건 관객들이 스스로 채워거나 그냥 구멍으로 두어야 합니다. 이런 구성 때문에 오히려 더 추리애호가의 각본처럼 보이기도 해요. 초보자들은 빈틈을 견디지 못하니까요. 단지 진상이 좀 단순한 편인데, 추리물이니 조금 더 어려운 길을 가도 좋았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캐릭터들을 고려해보면 지금이 더 맞는 것도 같고요.
수사 위주로 구성된 영화의 건조함을 보완해주는 건 현수의 캐릭터와 드라마입니다. 전 종종 요새 추리작가들이 탐정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죽던 밤]에선 현수의 사연과 고통은 꼭 필요합니다. 사라진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망가진 자신을 치유하기도 하는 형사 이야기거든요. 설정상 현수와 세진은 같이 나올 이유가 없고 둘의 사연은 전혀 다르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게다가 이정은을 연결점으로 해서 김혜수와 노정의가 보여주는 연기가 아주 매력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김혜수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현수가 상대하는 의미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에요. 상사, 친구, 사라진 아이, 수상쩍은 용의자 모두요.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남자가 한 명 등장하긴 하는데, 영화는 이 사람의 사연을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대신 영화는 추리물이 수사과정을 통해 상처받은 여자들의 이해와 연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어두운 상황과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낙천적입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힐링되는 느낌이예요.
출처: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