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액션, SF
개봉일 : 2020-08-26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애런 존슨
등급 : 12세 관람가
크리스토퍼 놀런의 [테넷]을 보고 왔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의 극장 나들이였는데, 다음은 언제가 될 건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시간여행 이야기입니다. 단지 놀런은 좀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인버전이라는 기술을 이용하면 물체의 시간 흐름의 거꾸로 돌릴 수 있고, 이를 이용해 과거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파인만의 가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 같아요. 중간에 설정이 물리학 석사인 로버트 패틴슨의 캐릭터가 양전자 운운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이걸 거시세계에 적용하면 그렇게 잘 먹히지 않습니다. 놀런은 저보다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킵 손 같은 노벨상 수상자 친구 (부럽다)의 과학 조언도 들었겠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이야기 상당부분은 말이 안 될 거예요. [메멘토]에서처럼 알면서 그냥 밀어붙인 거겠죠. 물론 [메멘토]보다 더 말이 안 될 것이고.
영화는 존 데이빗 워싱턴이 연기하는 이름 없는 CIA 요원이 정체불명의 집단에 포섭되면서 시작됩니다. 미래의 후손들이 인버전 기술을 이용해 현재를 정복하려 하고 있는데, 이를 막는 게 임무지요. 안드레이 사토르라는 러시아인이 미래인들의 음모와 관련이 있는데, 주인공은 학대당하는 사토르의 아내 캣과 가까워집니다.
스토리 자체는 그렇게까지 복잡하지 않은데, 따라잡기는 조금 어려운 영화입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시간 퍼즐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다소 산만하게 이어지는 초반부를 따라가다보면 중반에 인버전을 이용한 본격적인 시간여행이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 전반의 엉성하고 이상했던 부분이 설명됩니다. 그 설명이 온전한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요.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영화적입니다. 필름이라는 것은 발명초기부터 시간여행이 가능한 발명품이었어요. 우리는 필름을 통해 시간을 고정하고, 이를 앞으로도, 뒤로도, 2배속으로도, 4배속으로도 돌릴 수 있습니다. [테넷]은 이 영화적인 우주 속에 캐릭터들을 넣고 필름을 사방으로 돌립니다. 이들은 필름 위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필름을 뒤로 돌리면 여러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캐릭터나 스토리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이들이 순행하고 역행하는 시간 흐름 속에서 겪는 물리적 충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인간의 사정이 언제나 우선순위의 맨 위에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도 캐릭터와 드라마가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캣이요. 단지 이 캐릭터와 드라마가 지나치게 본드걸스럽고 피해자성이 너무 두드러진데다가 이를 충분히 봉합하지 않아서 무척 신경이 쓰입니다.
최근에 나온 놀런의 영화 중 가장 가벼운 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놀런은 농담처럼 보이는 영화 안에서도 무지 심각하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은근히 이전 놀런 영화들의 패러디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갖고 있습니다. 초반의 화물 운송기 사고 장면이 그렇지요. 물론 자신의 대외 이미지를 갖고 놀고 싶어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단지 이 영화에서 놀런은 자기 영화의 놀런스러움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처: 듀나의 영화낙서판